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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Libertarianism)는 비현실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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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정치 이론

07/07/2018

[Translated by Hyuk Cheol Kwon (권혁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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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자유주의는 -국가로부터의 보다 많은 자유를 내세우는 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마찬가지로- 윤리적 및 경제적 다양한 이유들을 내세운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국가가 없다면 우리는 불평등, 대중들의 궁핍, 과도한 탐욕 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자유주의는 바람직하지도 않으며/않거나 정당화될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익히 들어 왔던 비판이다.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유주의 및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며, 자유주의자는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는 몽상가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유주의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와는 관계없이 자유주의는 불가능(impossibility), 불확실(improbability), 혹은 단순히 자유주의적 이상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합쳐져서 전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 주제에 주목할 것이다.

우선 먼저, 비폭력이라는 자유주의 윤리에 대해 살펴보자. 자유주의의 비폭력 윤리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동의 없이는 당신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 물리적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광범위하게 말한다면, 폭력(violence)과 공격(aggression)이 최소화된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과 공격이 최소화된 세상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목표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자.

불가능성(Impossibility)

우선 살펴볼 것은 자유주의 윤리를 달성하는 것이 물리적 또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 여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한 문장(명제)이 윤리적 문장(명제)으로서 유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으로 이행 가능한 범주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한 사람에게 동시에 두 곳의 장소에 나타나야 한다거나 3개의 사과에 1개를 추가해서 사과 5개를 만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요구를 하는 윤리라면 우스꽝스럽다. 이런 것들은 달성하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하는 문제와는 관계없이 달성될 수 없는 목표들이다. 마찬가지로 엄격한 의미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윤리적 명제도 있다. 그 명제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거나 대부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중국으로 점프를 해보라는 윤리라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한 사람이 영국의 땅을 박차고 올라서 공중을 날아 중국에 도달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수단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으며, 따라서 현재 이것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침으로 삼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1

자유주의 윤리가 이러한 종류의 불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특정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요구인 자유주의 윤리는 모든 윤리들 중 ‘가장 지키기 쉬운 것’들 중 하나이다. 그저 간단히 타인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침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로 지금 당장 안락의자에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즉, 폭력과 공격 행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므로, 이 윤리는 바로 지금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행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 윤리를 위반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더 힘들다고 말할 수 있다. 폭력적인 행위를 하려면,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될 일을 굳이 일어서서 상대를 찾고 그리고 그를 공격하거나 강도짓을 하는 행위를 벌려야하기 때문이다.

다소 진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윤리와 다른 윤리들, 예를 들어 빈곤의 극복, 민주주의의 확산, 평등의 촉진, 혹은 행복이나 성취감의 추구처럼 훨씬 더 미묘한 목표 같은 다른 윤리들의 물리적 달성 가능성을 비교해보자. 이 모든 윤리들은 주류(mainstream)측에서 볼 때는 완벽히 타당하며 고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유주의 윤리에 비해 달성하기는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이 윤리들은 일종의 적극적인 행동(positive action)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극복은 더 많은 노동, 더 높은 생산성, 그리고 보다 많은 부의 창출을 요구한다. 민주주의의 확산은 무장 투쟁, 적극적인 평화유지, 그리고 선거를 관리하는 제도의 설립과 국민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투표장으로 향할 의지가 요구될 것이다(물론 이러한 이상이 순수하고, 단순히 권력을 잡거나 자원에 대한 통제를 하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가 아니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그렇다). 평등은 생산적인 노력을 통해 우선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부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조롱거리로 전락해 있는 자유주의가 칭찬 일색인 다른 것들에 비해 훨씬 더 현실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유주의 윤리는 공허하고 실질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과 국가는 주류가 인정하고 있는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 같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판단하자면, 이 목표들은 전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면서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을 시장가치보다 낮게 책정되도록 만들면서 수요가 폭증하여 공급부족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면 비정상이다(의료보험, 꽉 막힌 도로 등을 생각해보라). 돈을 찍어 내서 부를 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는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끝없이 쌓여가는 (정부)부채와 엄청나게 늘어나는 (정부)지출이라고 하는 현재의 상황이 (지속)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탄생할 당시에 서구 국가들에게는 지난 수 세대에 걸쳐 축적한 자본이 있었고, 이 축적된 자본이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 놓았었다. 이것이 정치인들에게는 절대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금고(Fund)가 되어버렸고, 그들은 이 돈을 퇴직 수당, 복지 수당, 산업의 국유화, 공공 소유 사회간접자본 등등의 형태로 유권자들의 표를 사기 위한 뇌물로 활용했다. 정치인들은 증세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지출하려고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출의 대부분은 차입금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축적된 자본이 이 정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세수가 확보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정부 부채와 인플레이션은 사회의 양 극단, 즉 가장 약한 계층과 가장 강한 계층 -복지 혜택의 대부분을 받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인플레이션의 위협을 자산의 명목가치 상승으로 극복한 가장 부유한 사람들-, 그리고 정부 부채 상환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 은퇴하게 되어 단물만 빼먹게 되는 베이비붐 세대에게 혜택을 주었다. 이 사치스러운 낭비성 소비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자본소비를 은폐해 왔지만, 이제까지의 무자비한 자본소비로 인해 이제는 자본의 생산성이 증가하는 지출 수준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되어버렸다. 오늘날 정부는 세입만으로는 부채에 대한 이자를 상환하기에도 급급하며, 상환 기간이 도래한 부채를 갚기 위해 또 다시 더 많은 차입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 특히 현재 앞서 언급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하고 있으며, 이는 이제까지 은퇴자들을 지탱해 왔던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앞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성이 충분하지 않다면, 세 가지의 선택 대안만이 남게 된다. 각종 복지 혜택의 폐지, 혹은 채무 불이행 선언, 혹은 지폐를 마구 찍어서 모든 지불을 다 하는 것이 그것이다. 첫 번째 대안은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야기할 것이고, 두 번째 대안은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대안은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유발할 것이다. 매우 불편한 일이지만, 곧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다른 것도 아닌 정통적인 통화론(monetary orthodoxy)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금으로의 복귀나 가상화폐(암호화폐, Crypto currency)처럼 비국가적으로 추진되는 해결책들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2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에 의해 통제된 화폐와 금융이 붕괴 직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온건한 국가주의자들이 볼 때조차 우습게 보인다.

인간 본성(Human Nature)

자유주의 윤리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두 번째 이유로는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해 모호하게 정의된 인상(vaguely defined impression)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 견해는 거의 언제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은 전체 역사 속에서 종족, 문화, 민족(nations),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가와 같은 다양한 집합체를 형성해 왔다고 하는 (맞기는 하지만 매우 피상적인) 관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집단들의 부침(vicissitudes)―다시 말해, 개인을 집단에 종속시키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폭력과 공격을 퇴치하는 규칙들―을 고려해 본다면, 최소한 자유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수준까지 자유주의의 이상이 실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것들인데, 그 이유는 이들이 국가와 사회를 혼합시켜 버리고, 그리고는 이로부터 전자(국가)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책망이 후자(사회)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추정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일종의 이기적이고 원자론적인 존재에 대한 옹호로서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다.3

물론 이러한 견해들은 보통은 자유주의는 사회적 조직이나 혹은 사회 전체와 그 어떤 마찰도 빚지 않는다는 말로 간단히 퇴치될 수 있다―자유주의는 인간의 모든 사회적 영역을 충분히 고려한다. 이들 비판가들은 사회의 역할이 “공동의 목적”(common purpose)이나 국가에 의해 제시된 “공동선”(common good)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인 각자가 자기 자신의 목적을 평화적이고 자발적으로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4 개인의 권리에 의해 허용되는 그러한 목적들을 추구하는 것도 이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어떤 사람이 타인과 한 푼도 나누지 않고 엄청난 재산을 쌓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전 생애를 타인을 돕는 데 바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주장이야말로 한층 근본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관심을 갖는 복잡한 제도들―즉, 국가, 정부, 의회, 관료제 등등이―이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간 본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이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간 선택의 산물인지 하는 경우가 그렇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종류의 제도들을 만들도록 하는 것과 돼지가 오물통에서 뒹굴도록 하는 것이 같은 종류의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암묵적으로 ‘그렇다. 다르다’라고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자유주의는 “인간 본성”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해 완전히 기각되거나 한다. 예를 들어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삼아서 자유주의는 인간 생활의 사회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미국 생물학자 피터 코닝(Peter Corni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의 (비현실적) 모델의 한 가지 문제점은 인간 본성의 개인주의적이고, 소유욕이 많고(acquisitive), 이기적인 유전자 모델이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 인간의 진화에 관한 증거는 우리 인간 종(種)은 소규모의, 긴밀한 관계의 사회적 집단들로 진화했고, 그 속에서 우리의 개인적, 경쟁적 자기이익 추구보다는 공동선을 위해 협동과 나눔(sharing)을 우선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는 강력하게 상호 의존하는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고 타인에 대한 공감, 호혜(reciprocity)에 대한 민감함, 우리를 서로 묶어주는 집단에 대한 포용과 충성심, 협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적인 만족감, 그리고 타인의 존경과 인정을 받기 위한 관심은 인류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충동을 완화하고 제한하도록 진화시켰다.”5

이 주장에 대해 많은 것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코닝은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나 인간은 왜 이런 것들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왜 협동을 할까? 사람들은 왜 서로 나눌까? 사람들은 왜 “포용되고자” 할까? “우리를 묶어주는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타인의 존경과 인정”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마치 파리들이 두엄더미로 몰려들 듯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각각의 인간들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수용하도록 한 의식적으로 평가될만한 이유들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분명하게 존재하는 인간 본성의 측면은―이것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시킨다― 목적을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이 결정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탐색하고자 이성이라는 정신적 자산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인간의 이런 의식적인 의사결정과 그에 뒤따르는 의식적인 행동이야말로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 분명하다. 물론 아주 뜨거운 물건을 만지고는 순간적으로 움찔할 때처럼 반사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런 행동은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 신체적 위험을 즉각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반사행동을 하도록 뇌를 자극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 행동들은 우리의 본성의 일부이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거의 모든 다른 것들은 그의 의식적인 의사결정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거나 혹은 낯선 사람과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성욕을 채우는 것과 같이 매우 감정적 또는 본능적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충동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는 의문시 되는 행동이 불법적으로 발생하게 되면 법이 우리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동물적인 분출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생각과 행동 사이에 거의 아무런 연계가 없는 정도의 정신적 장애(mental impairment)가 있을 때만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적 선택이라는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곧 인간 본성이라고 하는 왕관에 달려 있는 보석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곧 사회적 현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게 된다. 이에 대해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와 의식을 갖고 있다. 인간이 의식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들의 행동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선택해야만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 원초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것―인간의 자유의사(volition),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무시하는 것―은 실제에 관한 사실들을 오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심각하고도 급진적으로 비과학적이다.”6

로스바드가 말한 바로 이러한 무시야말로 인간행동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서 거기에 일종의 불가피성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도덕적 감시로부터 벗어나도록 함으로써 자유주의는 “인간 본성”에 반한다는 주장으로 하여금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빈약한(laziest) 반박 중의 하나가 되도록 만든다. 만일 인간의 행동이 의식적인 선택의 산물이라면 그러한 행동은 결코 “자연적”(본성적)이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선택한다는 바로 그 자체는 대안적인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완전하게 달성 가능한 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 경로를 선택함에 있어 각각의 인간은 세 가지 광범위한 성취 경로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첫째, 원자적이고 고립된 삶; 둘째, 사회적 협력; 마지막 셋째, 폭력, 도둑질 및 약탈. 첫 번째 경로는 빈곤하게 살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다.7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경로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커다란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

언제 사회적 협력이 우세하고 언제 폭력이 우세할 것인지는 각각의 상황에 대한 인간의 평가와 그 상황 하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평가의 산물이다.8 이들 상황에 대한 가치평가는 인간의 정신적 노력의 산물이다. 각각의 경우에 목적들이 존재했으며,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이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비록 그 평가가 잘못된 것이어서 실패로 끝날 수도 있지만, 추구했던 길이 무엇이었든 그것을 결코 “자연적”(본성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인 충동”에 그 책임을 미룰 수는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이 이루어내는 엄청난 성과―예를 들어 성(聖) 판크라스(St. Pancras) 기차역의 고딕양식의 화려함, 내연기관의 복잡함, 혹은 모든 가정에 PC를 설치하도록 하겠다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야망―에 감탄할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을 창조한 사람들은 “공동체”(community)에 뿌리 내린 어떤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드는 것 이상의 그 무엇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폭력적 측면에도 지난 전쟁 이후 충분히 긴 시간이 흘렀다고 사람들이 느껴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들은 (종종 잘못 사용되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는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유일하다. 언어, 화폐, 시장가격 등등은 어떤 한 개인이나 혹은 함께 행동하는 개인들로 형성된 한 집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조차도 의식적으로 선택된 목적의 결과물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도적인 디자인(design)이 없을 뿐이다. 예를 들어 만일 사람들이 거래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화폐도 가격도 없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의 다양한 상황―그것들 중 일부는 자연적 현상이고 또 다른 일부는 인간의 과거 활동과 신념의 산물이다―으로 인해 어떤 때는 사회적 협력이 흥했다가 또 다른 때는 폭력이 흥하는 등 밀물과 썰물이 있어왔다. 각 천년기(millenium)는 상대적인 평온기와 상대적 혼란기가 교차되었으며, 최근의 100여 년 동안은 폭력적인 경로가 최고조에 달했다. 한편, 사회적 협력은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기간 동안에 크게 신장되었다.

후자(後者)의 전개는 환경이 인간의 선택에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산업화 이전의 농촌 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와는 달리 인간은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비생산적이었던 농촌생활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발명(품)과 기계로 가능해진, 이전에 비해 훨씬 높은 생활수준을 약속하는 산업 현장에서 일하려는 기대를 안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적 협력의 확산이 가장 매력적인 선택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100년에 걸친 부의 창출이 있고 나자 사회주의 이론이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이유로 많이 가진 자들의 부를 폭력적으로 탈취(appropriation)하자고 설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9 그러다보니 20세기는 이른바 착취계급으로부터 부를 빼앗고 노동자들의 궁핍을 영원히 추방하겠다는 그릇된 약속을 했던 여러 다양한 사회주의로 점철되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이 모든 시도들이 실패로 판명되자 사람들은 다시 시장경제로 돌아섰다. 현재 우리는 양쪽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듯이 보이며, 냉전의 분명한 승자인 서구사회는 점증하는 권위적인 정부의 보호 하에 지속적으로 경제가 사회주의화되고 자본이 소비되는 반면, 아시아 사회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10

인간들이 자신의 욕구를 보다 잘 충족시키기 위해 사회적 협력을 하는 방향이나 아니면 폭력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모든 물질적인 희소성이 제거되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욕구가 해소된 미래를 상상해볼 때 보다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경제적 발전이 고도로 이루어지면 사적인 안전과 방위(security and defense)까지도 포함한 그 어떤 재화나 서비스도 단추 하나만 누르면 제공받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단추 하나를 누르는) 약간의 노력만 해도 얻을 수 있게 된다. 만일 그런 세상이 된다면 인간이 광범위하고도 체계적인 규모에서 사회적 협력이나 아니면 폭력을 추구할 필요성이 진실로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만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스타 트렉(Star Trek)에 나오는 장치와 같은 “복제기”에서 나온다면 동료 인간과 힘들게 협력할 이유도 없고, 그를 총으로 쏠 이유도 없을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총을 겨누는 경우에도 만일 개인과 그 개인들의 재산이 이른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군대(invisible force field)에 의해 보호된다면, 국가가 방위 목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이런 천국과도 같은(quasi-paradise) 세상에서 산다고 할 때 사회적 협력이나 폭력이 가능하도록 하는 거대하고 체계적인 조직 ―국가, 회사 등등―은 그것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어졌으므로 진짜로 사라지지 않을까? 오로지 즐거움(안락)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들―가족, 친구 집단, 신도 집단, 그리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 등등―은 계속 존속할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순수” 자유주의자들(“purist” libertarians)이 옹호하는 것과 유사한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즉, 체계적인 집단과 만연한 폭력은 먼 옛날에 있었던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가 그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의심할 것도 없이 엉뚱한 환상이며, 최소한 현재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환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진보가 충분치 않아서이지 “인간 본성”과 일치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협력이 복잡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서 협력한다는 것 자체가 혜택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 친밀감, 고독을 극복하는 것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가족과 같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집단에서조차도 본래는(originally) 의식적으로 평가되는, 경제적 이해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한 최고의 환경을 고르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폭력과 전쟁 그 자체를 찬양하는 변태적인 이론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보다는 영웅주의, 동지애, 용맹성, 승리의 퍼레이드, 민족적 자존심, 훈장 등등과 같은 전쟁의 파생물이 종종 숭배의 대상이 된다.11 다른 한편, 실제로 전쟁을 하는 것은 강력한 경제적 동기가 없으면 주류(mainstream)가 되지 못한다. 비록 전쟁에 대한 우상화가 나치즘처럼 보다 실질적인 이데올로기로 확고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조차도 여전히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치가 먼저 “피와 땅”을 찬양하고 “농민 전사”(warrior peasant)가 나타난 후에야 세력(momentum)을 얻게 되었던 것이 당시 독일의 경제적 상황이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생활공간과 관련해 이미 인식되고 있었던 경제적 필요를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것을 어느 정도는 낭만적으로 구현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모든 이슈들을 무시하고 협력과 폭력은 순전히 그 자체로 추구된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그것들이 의식적인 인간 선택의 산물이라는, 즉 목적들이 의식적으로 평가되고 수단들이 의도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우리의 근본적 테제(These)를 변경시키지는 못할 것이다.12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국가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의심의 여지없이 국가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들 중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공격적인 제도이다. 역사책 속에서 언급되는 모든 갈등은 국가 혹은 국가와 유사한 연맹체(proto-state entity)에 의해 저질러진 것들이며, 국가 개입의 감소나 배제를 통해 개선되지 않는 갈등도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노력을 바로 이 제도에 쏟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인간 본성”에 반한다는 주장을 근거로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국가라는 것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 본성”의 현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결론적으로 다툴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앞서의 분석에서 이미 명확해졌듯이 국가는 인간 본성의 현상이 아니다. 국가의 존재는 누군가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다른 누군가에게 혜택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궁극적인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인류 역사를 통해 국가는 단일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도록 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떠받들도록 만드는 도구로서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위대한” 제도들―의회 건물들, 행정 부서들, 고도로 훈련된 군대와 그들이 사용하는 복잡한 무기와 장비들 등등―은 “본성”(natural)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런 것들의 존재는 특정 시점과 특정 장소에서 특정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드는 것이 가치 있는 과업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그것들의 최종적인 형태는 단지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의식적인 선택 행위들의 산물일 뿐이다.

침략, 전쟁과 정복, 원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노예화, 과중한 세금 등등 국가가 일으키는 갈등의 양상도 다양하게 변해왔다. 이런 것들도 모두 그냥 무(無)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선택된 목적을 위해 취해진 것들이다. 나아가 전체 역사 속에서 국가의 강력함과 힘(power)은 항상 변화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곳에서 변화되고 있다. 아마도 지구상에 나타났던 국가들 중 최악이라 할 수 있을 구(舊) 소련이라는 경악스런 국가에서부터 스위스의 칸톤(Canton)처럼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국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비도덕적이고 사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혹은 그들이 국가를 통한 강압적인 수탈이 덜 매력적이도록 하는 제도들(또는 재편되는 세계적인 힘의 균형)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전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국내적으로 볼 때 스위스 모델이 성취했던 것이며, 국제적으로는 전 세계에 걸쳐 거침없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유일 강대국인 미국의 지금까지 지위에 대한 대항마로서 중국과 러시아의 상대적인 부상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국가란 인간 본성의 결과가 아닌 인간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 확고부동하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도덕적 시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이에 대해 칼 헤스(Karl Hess)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이 인간과 역사를 일정불변의 패턴에 따라 운명처럼 위 아래로 왔다갔다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는 결정론자가 아니다. 급진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자는 인간이 역사를 바꿀 수 있고, 인간이 역사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뿌리부터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13

자유주의는 인간본성에 반한다는 것에 대한 방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인간본성은 사실 자유의 존재 이유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선택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하는지와 관계없이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한다. 당신이 무엇을 바라보든 관계없이 이 행동들을 이행하는 개별 인간을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높게 평가한다. 비록 우리의 생각과 욕망이 다른 사람들 혹은 우리가 가입하고자 선택한 집단에 의해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은 궁극적으로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그런 특정 선택의 결과로 성공의 기쁨을 누리거나 실패의 고통을 느끼는 것도 개인으로서의 우리 자신들의 몫이다. 자유주의는 예외 없이 모든 개인들 각자에게 자신의 개성(person)과 재산의 범위 내에서 혹은 자발적인 파트너와 함께 하는 공동 사업의 범위 내에서 이런 독립적인 욕망과 선택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14

다른 한편, 국가주의는 “보다 나은 사회”라고 하는 거창한 비전을 추구하기 위해 이런 개인들의 선택, 욕망, 그리고 행동들을 배척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국가주의는 지도자(Leader)나 참견하기 좋아하는 공상가들(visionaries)이 꿈꾸는 “보다 고상한” 이상을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는, 일종의 개조된 신(新)인간을 상상함으로써 개별 인간들의 욕망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사람들 각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반면, 부담은 다른 사람들이 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주의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것을 내세우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은 “능력”이라는 범주보다는 “필요”라고 하는 범주에 속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후자(後者)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협력하고자 하는 동기는 사라지고, 국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기 위해 총으로 협박하고 강제노동수용소를 설치하고 운영해야만 한다. 이러한 인간 본성과의 불일치는 왜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하는데 자유사회는 번영을 구가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즉, 인간 본성과 합치되는 것은 개인적 자유이지 자동화되고 로봇화된 국가 유착이 아니다.

[3-3]

급진주의 대(對) 점진주의(Radicalism vs. Gradualism)

자유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주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버전으로서 지금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반드시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버전이다. 그런데, 이 버전은 민주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또 사람들이 본래 국가주의적이어서 자유주의적인 사회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그 어떤 희망도 좌절될 것이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결국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기본적인 추동력은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급진적 특성에 대한 공격이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급진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에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는 공격이다. 반(反)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이유들을 통해 자유주의를 묵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한다. 다른 한편 자유시장 지지자들 중 몇몇―예를 들어 말년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같은 사람―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일종의 점진주의를 통해 국가 시스템 내에서 보다 많은 자유를 달성하고자 시도한다. 우리는 반급진주의를 통해 국가주의를 변호하는 쪽과 자유에 대한 점진적 접근을 시도하는 쪽 모두를 비판한다.

먼저, 하나의 명제는 그와 반대되는 명제가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잘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급진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기 없는 명제가 진실 혹은 정의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자면, 누구나 한 때는 지구가 평평하고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합의가 이뤄졌다고 해서 그 합의가 지구가 둥글게 생겼고 그리고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하며, 또한 그와 같은 합의가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에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도록 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흑인을 살해하거나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 기꺼이 살해하고 강간했다고 해서 이런 행위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중단시켜야만 되는 본질적으로 악한 행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즉각 중단되어야만 하는 행동이다. 뿌리박힌 견해에 반하는 주장을 할 때 따르는 어려움은 급진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우리의 전략을 분명 더 어렵게 만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자유주의자들이 보이는 태도와는 달리, 무엇보다도 목표 그 자체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진실은 모든 사람들이 없어지기를 원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실이 -가령 국가의 진정한 특성과 국가가 인간을 망치는 방식과 같은 것이- 드러나면 아주 강력한 결과로 이어져 어려움을 겪는 고통이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권력에 -또는 심각한 역경에- 대항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주의의 징표라기보다는 비겁함의 징표이다. 필요한 용기를 끌어 모으는 데 있어 수반되는 복잡성에 대해서는 아마도 조셉 페덴(Joseph R. Peden)이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가잘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자유주의 혁명은 하루아침에, 혹은 10년 안에, 혹은 자신의 일생 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과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정이다. 투쟁의 초점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뀐다. 한때는 노예제의 폐지가 초점이었다; 현재는 초점이 여성 해방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초점이 민족해방 투쟁일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시민의 자유가 초점이 될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선거운동과 정당정치가 초점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때에는 무장(武裝)을 통한 자위(self-defense)와 혁명이 초점이 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 가운데에는 국가가 해체되고 무정부주의가 우세해지는 묵시록적 순간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 중대한 순간이, 설혹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올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은 자유주의 철학의 완결성과 타당성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 [이는] 자유주의가 광범위한 인간적 이해를 통해 숙성되지 못하면 유아적인 환상으로 쉽사리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자유주의는 어떤 고정 관념이나 신비한 마술적인 공식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복잡성에 한 번 다가가 보라는 도덕적 명령이다.”15

역사의 발전을 돌아보면 사상들―특히 급진적 사상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스페인 철학자인 호세 오르테가 가셋(José Ortega y Gasset)이 “문명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고 알려주었던 것처럼, 그것이 또한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16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문명의 존재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 문명을 파괴하려는 것들을 격퇴하면서 올바르게 유지하려는 사상을 갖고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사상들 대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오직 소수의 지식인이나 저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정도로 급진적이며 대중들로부터 조롱당하는 이론들로 시작했지만, 이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다음에는 중대한 결과로 이어졌었다. 예를 들어 계몽 철학이 없었다면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및 산업혁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급진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모호한 상태에서 죽었지만, 그의 이론은 세계의 절반을 노예화시켰다; 민주주의는 정치사상사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누군가가 민주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말만 꺼내도 이상한 사람으로 조롱을 받는다. 나아가 점점 심각해지는 국가의 팽창과 계속되는 국가의 잔혹행위에 대해 이제까지와는 달리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면죄부를 민주주의가 국가에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예를 들어 천년에 걸친 왕국, 황제국, 그리고 견고한 왕조(王朝)도 전적으로 지폐(paper money)로만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그 일을 불과 수십 년 만에 해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극적으로 변해 왔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주 엄청난 영향을 주어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역사의 경로를 바꾸고자 한다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준비를 해야만 한다.17 오늘 비난을 받는 사상들이 내일이면 칭송받게 되고, 오늘 볼 때는 승리가 너무나 멀어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것은 아니다. T.S.엘리엇(Eliot)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하나의 사안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가장 현명하게 바라보게 되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 성공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와 투쟁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패배와 우리의 실망이 우리 후손들의 승리의 서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승리가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승리하기를 기대하면서 투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계속해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제 점진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최종 목표나 급진적인 원칙을 내동댕이치는 전략은 어떤 사안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러한 전략은 자신이 선택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무언가 다른 지도적인(guiding) 철학으로 메꿔야만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명백하게 점진주의적인 접근 방법은 이런 저런 종류의 공리주의로 귀결되었다. 이에 덧붙여 점진주의가 국가를 비판하던 것과는 반대로 국가와 긴밀히 연관되어 활동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다보니, 그 지지자들은 국가가 저지르는 기본적으로 부정의한 일들(가령 과세, 규제, 그리고 법과 질서유지 및 국방에 대한 독점력 행사 같은 것들)이 영속화되는 것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받아왔으며, 그러다보니 그들의 비판도 어떤 종류의 비판이냐 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수준의 비판이냐 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집착하는 “효율성”이라는 척도는 점진주의적 접근법으로 하여금 그들이 괜찮다고 보는 이러한 부정의한 일들을 인정하고 확장시키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자유화 프로젝트(liberalising project)의 성격이 부정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그보다도 더한 부정의로 대체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18

예를 들어 19세기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논쟁은 노예소유주들이 노예를 잃음으로써 발생하는 “재산”상의 손해를 보상해 주어야 할 것인지 아닌지 하는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노예소유주가 아니라 수년 간 비참한 생활을 해왔던 노예들이며, 노예소유주들은 오히려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지적했던 사람은 급진적 철학자인 벤자민 피어슨(Benjamin Pearson)이었다. 마찬가지로 “학교 바우처”(School Vouchers)제도에 대한 제안들은 국가에 의한 주입식 교육의 본질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교육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납세자들의 선택과 주권에 대한 일말의 고려조차 하지 않는 채 그저 “선택”, “경쟁” 및 “소비자 주권”의 이점에 대해서만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어떤 조세 개혁도 “조세수입의 중립(revenue neutral)”이 지켜질 수 있도록 세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항상 엉망이 된다. 조세수입의 중립성은, 아담 스미스 연구소의 2017년 조세개혁 계획의 첫 번째 문장의 중요성으로 판단하건대, 이 연구소의 우선 관심 사항으로 보인다.19

이제 여성을 강간하고 흑인을 살해하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상상 속의 사회로 돌아가 보자. 점진주의적 접근법은 살해자나 강간범이 살해하고 강간하는 즐거움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 혹은 “강간 바우처”를 발행하자고 할지 모른다; 혹은 “살해 개혁”은 “살해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제안들이 아주 우스꽝스러운 제안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유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진주의적 접근방식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진전으로 이어지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운동을 인정하는 사람을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말하자면 비록 나머지 세금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이런 저런 조건이 붙지 않는 10%의 세금 감면을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완전하고도 가장 빠르게 획득한다는 희망을 품고 (협상)테이블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 강간, 노예제 등과 부딪히게 되면, 이 사악한 것들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희망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물들은 이 척도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단지 절반의 해결만을 요구하면서 테이블에 앉게 되면, 절반 이상의 해결은 결코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게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이 “이론적으로는 점진주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속주의(perpetuity)다”라고 말했던 이유이다.20

또한 우리는 우리가 부정의를 제거하는 일에 대해 훨씬 더 큰 재앙이 뒤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예를 들어 복지 혜택을 받던 사람이 혜택이 줄어든다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 경고를 날리는 사람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국가에 의해 이미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신중함의 표현일 뿐이다. 이것은 부정의를 저지르는 자가 살인자, 강간범, 노예소유자가 되었든 아니면 “사회”가 자기 자식들을 교육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평범한 부모가 되었든 관계없이 희생자의 자유보다도 이들 부정의를 저지르는 자들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진주의적 접근법을 졸렬하게 모방한 것이 결코 아니다.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이렇게 말한다:

“이론상으로 점진주의는 실제로는 다른 비자유주의적 또는 반자유주의적인 숙고사항들에게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목표 자체를 약화시킨다. 점진주의의 선호 순서에서는 이들 다른 숙고사항들이 자유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21

실제로 점진주의의 치명적 결함은 배를 탈취한 해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탈취당한 배가 암초에 부딪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비록 럼주가 담긴 통을 나눠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도 이와 관련하여 역할을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지만.) 그러나 급진적 사상의 목적은 배가 물 위에 떠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다. 배가 물에 잠겨야 구조된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듯이, 심각하게 사회주의화된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배는 거의 확실하게 가라앉고 있다. 예를 들어 1980~1990년대 소련이 무너졌을 때 장기간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원했던 것은 이미 재앙적으로 실패한 것의 약간 약화된 버전이었다. 서구의 학자들이 마르크시즘을 찬양하고 케인즈주의에 대해 설파하느라고 무척이나 분주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그러고 있던 기간이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에 결정적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지만 그냥 흘려보냈다.22

자유 시장 개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오랜 기간 지속된 경우가 최소한 두 번 있었다. 홍콩에서 코퍼트웨이트(John James Cowperthwaite)가 수행한 개혁과 뉴질랜드에서 더글라스(Roger Douglas)가 수행한 개혁이 그것인데, 두 사람 모두 각각의 정부 내에서 재무장관이었다. 전 영역에 걸쳐 국가주의적 개입을 일소하는 “빅뱅”(Big Bang) 접근방식을 통해 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더글라스 스스로는 왜 이런 접근법이 그리고 오직 이런 접근법만이 작동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23

첫째,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재빨리 도입함으로써 특수 이해집단들이 해당 프로젝트를 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이들이 특별한 개혁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게 될 즈음에는 또 다른 집단이 나타난다. 둘째, 분명한 목표에 한 단계 한 단계 식으로 접근해가기보다는 단박에 도달해야 그것의 긍정적인 효과가 더 빨리 나타나고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를 매우 빨리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은 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이해집단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더글라스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오직 몇몇의 국가 개입만이 조금씩 없어질 때 계속 잔존하게 되는 경제 왜곡의 문제도 해결한다. 셋째, 진보와 번영을 피부로 느끼면서 지지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이들의 지지가 반대자들을 무력화시킨다. 아주 그럴 듯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반대자들은 공허하고 진부한 이야기나 읊어대는 사람들로 전락한다.24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혁의 진행이 빠르면 빠를수록 법적 및 규제 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의 기간이 짧아지고, 이는 기업과 기업가들로 하여금 더 일찍 계획을 세우고 자본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25

무엇보다도 더글라스는 자신의 반대자들이 무기를 꺼내기도 전에 일을 해치웠고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신속하고도 급진적인 개혁은 실제 성공으로 이어지고, 이 성공은 다시 앞으로의 개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선순환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더글라스의 전임자였던 멀둔(Robert Muldoon) (그는 총리를 겸했었다)이 했던 접근법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멀둔은 단기간 내에 어느 누구의 사정도 나빠지지 않을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변화를 시도했다. 결국 그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반자유주의자들과 점진적인 자유시장주의자들 양쪽 모두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인정해줌으로써 급진주의 방어를 마무리할 수 있다. 만약 자유주의 목표가 한꺼번에 달성되어 지금 당장 국가가 무너지고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우리가 리드(Leonard Read)26 가 묘사했던 시나리오처럼 국가를 즉각적이고 가차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적색 버튼(red button)을 누르게 되면 어떻게 될까?

국가주의자들은 사회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할 것이고, 점진주의자들도 아마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라는 존재는 의식적인 선택의 산물이다―그것은 특정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국가가 이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들을 더 이상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면 이것이 이상한 일이다. 자연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하물며 행동하는 인간은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만일 국가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되면, 아마도 숨 가쁜 전환기가 오겠지만 사람들은 곧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고, 이러한 사적인 수단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독점적으로 제공하던 것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시민적 질서가 실제로 무너져 있는 기간은 이러한 사적인 수단들이 융성하거나 혹은 공식적인 조직들로 확고해질 때까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예를 들어 1992년 LA 코리아타운에서의 폭동. 2011년 영국에서의 폭동, 그리고 2014년 8월의 미주리의 퍼거슨 폭동처럼 공식적인 국가 경찰력이 구조에 실패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생기면 그러한 사적인 수단들이 곧 바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나쁜 짓(did otherwise)을 하면 국가가 우리를 벌할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사적인 살인이나 도둑질을 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가 없더라도 기꺼이 사적인 살인과 도둑질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을 자제하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라기보다는 오히려 a) 사람들이 그런 짓은 악한 짓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b) 순간적 희열만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삶의 수준을 낮추는 반생산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런 관점이 변하지는 않는다. 만일 국가주의 질서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세상은 (자유주의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만일 국가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지 그에게 물어보자.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사람들 틈에 낄 것인지, 창문을 깨부수고 가게에 불을 지를 것인지? 아니면 시민적 질서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만약에 그가 후자(後者)를 선택한다면, 도대체 그는 무슨 근거로 다른 사람들은 전자(前者)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실제로 국가를 제거하는 것은 폭력 행위가 합법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는 그런 제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합법성이라고 하는 가림막(베니어판)이 제거됨으로써 국가가 즉각적으로 파괴되고 나면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도덕적 개선이 재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점진주의자들의 논지가 순수 국가주의자들의 논지에 비해서도 허약하다는 점이다. 국가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시장(Marketplace)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 질서를 만드는데 적합하지 않다며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갑작스런 소멸은 대혼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며, 이런 면에서 최소한 나름의 일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점진주의자들은 보다 많은 음식, 의복, 자동차 등등을 제공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적 개인들이 “효과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몇 가지 이유를 들면서 그들은 자유사회로의 전환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이들 사적 개인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결론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원칙들은 매우 급진적이지만, 그 원칙들을 성취해나가는 길은 전혀 급진적이지 않다. 유럽연합(EU)과 같이 중앙집권화된 국가주의 프로젝트는 서구 문명의 문화적, 관습적, 종교적 기반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그들 자신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초국적(trans-national), 다문화적 거대 단일조직들(Monoliths)로 대체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러한 목표들은 예속 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있다. 그런 시도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하기 보다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시도들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구나 좌익/국가주의적 광란은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려서 정치풍자를 하는 사람들은 풍자의 소재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전에는 믿기지 않는 농담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완전히 현실처럼 되어 있다.27 잘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음은 물론이고, 기본적 논리와 상식(common sense)까지 재편성하려는 오웰식(Orwellian)의 노력―“언론의 자유”란 좌익이 동의하는 말을 할 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똘레랑스”(관용)란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인종, 동성애자 등에 대한) 증오”가 진짜 범죄보다 더 사악하다28; 성(gender)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약 50여 가지 정도나 된다; 누가 어느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 논할 필요가 있다―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주의자들이 급진적으로, 더구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원래 영국의 Ludwig von Mises Centre에서 발간되었다.]


저자) Duncan Whitmore

역자) 권혁철 (자유기업원 부원장)


Dr. Hyuk Cheol Kwon is a vice president of “Center for Free Enterprise,”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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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말은 윤리적 명제가 단순히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는 역경을 극복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이 이전에 이룩한 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떠밀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예를 들면, 내 골프 실력은 골프공을 그린에 올려놓는 것은 고사하고 벙커에 빠트리는 것이 다반사일 정도로 형편없을 수 있다. 하지만 내 골프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들 -골프채, 골프장, 연습할 시간-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재능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열심히 노력해보라고 누군가가 제안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갖출 수 있는 것을 갖고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국에서 중국으로 점프할 수는 없다. 이 두 개의 지점 사이에 있는 윤리적 명제들은 각각의 경우를 살펴 판단해야 한다.
  • 2.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어떤 특정 시스템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대안을 마련하고자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 3. 이러한 종류의 비판의 한 가지 예로서는 Peter Corning, What’s the Matter with Libertarianism?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the-fair-society/201108/what-s-the-matter-libertarianism을 보라. 그가 민주주의 추종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종류의 비판이 항상 그렇듯이, 코닝(Corning) 역시 전혀 일관성이 없다. 만일 어떤 개인에게 있어 선택할 자유가 “이기주의”(Selfishness)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면, 유권자 1인 당 1표를 행사한다는 원칙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각 유권자가 자신에게는 어떤 정부가 더 나은 정부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그런 경우가 아닌가?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그 어떤 정부도 결국 이기주의의 산물이란 말인가?
  • 4. 의도된 조직과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Duncan Whitmore, Libertarianism and the Collective, https://misesuk.org/2018/05/09/libertarianism-and-the-collective 참조.
  • 5. 앞의 각주 1) 참조.
  • 6. Murray N. Rothbard, The Mantle of Science, Chapter 1 in Economic Controversies, p.3. 물론 인간 행동에 대한 선구적인 설명은 미제스(Mises)가 동일한 이름(=인간 행동)의 책에서 다룬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Ludwig von Mises, Human Action – a Treatise on Economics, Part One 참조.
  • 7. 경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까지 막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다: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McCandless.
  • 8. 여기서 목적 달성에 유리한지 혹은 불리한지 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선택에 있어서 사상(ideas), 그리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차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9.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 대한 랄프 라이코(Ralpf Raico)의 냉정한 분석은 후자가 이러한 식의 생각에 예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Ralph Raico, Rethinking Churchill, in John V. Denson (e.d), The Costs of War – America’s Pyrrhic Victories; Ralph Raico, Winston Churchill: An Appreciation, Libertarian Forum, Vol. VIII, No. 8, August 1975 참조.
  • 10. 이러한 변동에 대한 앞선 실례로 로스바드는 현대 민족-국가의 탄생이 11세기부터 14세기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던 “중세의 생산과 교역의 팽창”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중세의 생산과 교역의 팽창이 부와 자본의 축적을 낳았고, 이 축적된 부와 자본이 “권력을 장악하여 그 부를 자기 자신의 비생산적인....목적들로 전용하고자 하는 커다란 유혹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Murray N. Rothbard, Conceived in Liberty, Vol. I, p.7.
  • 11.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 대한 랄프 라이코(Ralpf Raico)의 냉정한 분석은 후자가 이러한 식의 생각에 예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Ralph Raico, Rethinking Churchill, in John V. Denson (e.d), The Costs of War – America’s Pyrrhic Victories; Ralph Raico, Winston Churchill: An Appreciation, Libertarian Forum, Vol. VIII, No. 8, August 1975 참조.
  • 12. 자유주의의 공동체주의적 관점에 대해 잘 알려진 평론가 중 한 명은 “Bionic Mosquito”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블로거이다. 하지만 그는 이 관점을 “문화, 전통과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구현되지 못하는 “욕망”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즉 그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분으로서 그 자체로 의식적으로 평가될 그 어떤 이유도 없다는 식이다. 로버트 니스베(Robert Nisbet)의 책(One Hand Washing the Other https://bionicmosquito.blogspot.co.uk/2018/05/one-hand-washing-other.html ; and Community Lost https://bionicmosquito.blogspot.co.uk/2018/05/community-lost.html )에 관해 두 가지의 증명 시험을 하면서 “Bionic Mosquito”는 (예를 들어 “길드, 교회, 대학, 마을 및 가족”과 같은) 전통적인 것들이 개인주의 철학에 의해 훼손된 이후 “공동체”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명백한 노력에서 “기술관료적 국가”(the technocratic state)의 성장에 관한 (최소한 부분적인) 설명을 찾고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계몽주의가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 번영에 있어서의 공동체적 측면을 희생시킨 만큼 전통적인 공동체적 유대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취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사회 공학(social engineering)이 저지르는 참상을 용인했던 인간 이성의 무오류성에 대한 잘못된 믿음(예를 들어 하이에크(Hayek)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 rationalism)라고 불렀던 것)을 분명하게 고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철학들이 공동체주의 종말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국가주의/사회주의가 누리는 인기는 결코 “공동체”에 대한 뿌리 깊은 열망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경제적 미래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번영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1945년 노동당 강령 때까지 잘 튀겨진 비둘기가 배고픈 사람들의 입으로 날아간다고 하는 퓨리에(Fourier)의 우스꽝스런 묘사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주의”가 먼저 지역과 전통적 조직들을 붕괴시키고 이에 대중들이 “공동체”에 대한 자신들의 신비로운 갈망을 “전체주의화된 국가”에서 찾아 나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국가주의/사회주의를 도입하고 난 후에 이 국가주의/사회주의에 의해 이런 것들이 파괴된 것이다. 이러한 파괴는 권위, 충성심 및 경제적 번영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중심체들을 붕괴시키기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중앙에서 고안한 계획들이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은 문화혁명의 참상을 겪기 이전에 이미 20년 동안 공산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나아가 사회주의의 필연적인 실패가 실제로 전통적인 공동체적 관계를 복원시켰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재화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비공식적인 채널과 상호부조(mutual favors)였기 때문이었다.
  • 13. Karl Hess, What the Movement Needs, in Joseph R. Peden (Pub.), Murray N. Rothbard (Ed.), The Libertarian Forum, July 1, 1969, Vol. 1, no. VII.
  • 14. 따라서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기도 하는 자신들만의 문화, 도덕, 규칙 및 칙령을 갖춘 공동체, 클럽, 회사, 가족 등등 모든 종류의 자발적 모임(association)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완벽하게 인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주석 2) 참조.
  • 15. Joseph R. Peden, Liberty: From Rand to Christ, in Joseph R. Peden (Pub.), Murray N. Rothbard (Ed.), The Libertarian Forum, July–August 1971, Vol. III, nos. 6-7.
  • 16. José Ortega y Gasset, Revolt of the Masses, p. 62.
  • 17.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국가는 지식인들과 교육자들의 상호선택(co-option)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 18. 모든 점진주의자, 네오-리버럴 및 공리주의적 자유 시장주의자의 정치 이론은 명백한 국가주의자의 정치 이론과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든 정치 철학은 해당 철학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목표와 상충되지 않는 한 개인적 자유를 인정한다. 그런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자유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무엇으로 귀결될 때까지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놔두는 것에 만족한다.
  • 19. https://www.adamsmith.org/blog/taxin2017. 흥미롭게도 저자들은 단순히 의자를 재배치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이 프로그램을 “급진적”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보인다.
  • 20. 호페(Hans-Hermann Hoppe)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를 들어 하이에크나 프리드먼과 같은 온건한 자유시장주의자들에게서 벌어지는 이론 수준에서의 타협은.....철학적으로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비효율적이고 사실상 반(反)생산적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의 사상은 국가 지배자들과 국가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쉽사리 상호 선택(co-opted)된다.....다른 말로 하면, 이론적 타협 또는 점진주의는 국가주의의 잘못됨, 사악함 및 거짓이 영속되도록 만들며, 오직 이론적 순수주의, 급진주의 및 비타협주의만이 우선은 점진적인 실제 개혁과 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능한 한 최종 승리로 이끌 수 있고 또 이끌고 있다. Hans-Hermann Hoppe, Rothbardian Ethics, Ch. 15 in The Economics and Ethics of Private Property, p. 395.
  • 21. Murray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p.380.
  • 22. 동구권과 서구권이 만나는 컨퍼런스나 회담이 열릴 때면, 소비에트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의 경이로움에 대해 발언하는 반면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사회주의를 열렬히 찬양하더라고 하는 것이 냉전 기간 동안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슬프도록 아이러니한 농담이었다.
  • 23. 이하의 설명은 더글라스가 쓴 책 Unfinished Business에 대한 플로루(Floru)의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J. P. Floru, Heavens on Earth – How to Create Mass Prosperity, pp. 233-4 참조.
  • 24. 플로루에 따르면, 개혁에 대한 지지가 광범위하다보니 농부들이 보조금 폐지(subsidy-free)의 중요성을 이해할 정도였다고 한다. Ibid, p. 235.
  • 25.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영국이 EU 멤버국가에서 완전한 주권국가로 이행될 때 취했던 행동에서 점진주의의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기업에게 “확실성”을 제공할 필요성이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EU에서 완전히 탈퇴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이와는 반대로 탈퇴과정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3년에 걸쳐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어 그로 인한 법적 환경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도록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있다.
  • 26. Leonard Read, I’d Push the Button, https://fee.org/resources/id-push-the-button.
  • 27. http://www.digitalspy.com/tv/news/a850775/armando-iannucci-the-thick-of-it-wont-be-return-reason-why/
  • 28. http://www.breitbart.com/london/2018/01/02/london-police-will-ignore-minor-crimes-unless-hate-c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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