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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뒷면의 환상

Tags 자유시장세계역사간섭주의기타 학파

07/17/2018Murray N. Rothbard

[Translated by Haeng-Bum Kim (김행범)]

마르크스가 가장 애매하고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곳은 바로 그의 이론 체계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라는 그의 역사 변증법의 핵심이다.

역사적 유물론 및 마르크스의 역사관의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은 “물질적 생산력”(material productive forces)이라는 개념이다. 이 생산의 “힘”은 모든 역사적 사건들과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다. 그렇다면 이 물질적 생산력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결코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물질적 생산력이란 생산의 기술적 방식(technological methods)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란 말도 직면하는데 그것은 물질적 생산력, 기술적 방식들의 총합 또는 그것들의 체제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물질적 생산력, 이러한 기술들 및 “생산양식”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모든 생산관계 혹은 사회적 생산관계를 결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본다. 이 “생산관계” 역시 모호하게 정의되어 있는데 본질적으로 법적 관계 및 재산 관계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러한 관계들의 합이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경제구조”(economic structure of society)를 만들어 낸다. 이 경제 구조가 “하부구조”(혹은 “토대” base)가 되며 이것이 “상부구조”(superstructure)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는데 상부구조에는 자연과학, 법적 원리, 종교, 철학 및 다른 모든 형태의 “의식”(consciousness)이 포함된다. 요컨대, 하부구조의 밑바닥에 생산의 기술적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생산양식을 구성하거나 결정하며, 나아가 생산양식은 생산관계 혹은 법이나 재산권 제도를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생산관계는 사상, 종교적 가치, 예술 등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론 체계에서는 역사적 변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오직 기술적 방법에서 일어날 뿐인데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것은 특정 시점의 기술 상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기술 상태가 T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이 그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구조(S)라면 특정 시점(n)에서 마르크스에겐 다음과 같은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T → S​n

그렇다면 사회변동이 일어나는 길은 기술의 변동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T​n+1 → S​n+1

마르크스가 그의 저서 『철학의 빈곤』(Poverty of Philosophy)에서 자신의 기술적 결정론의 역사관을 가장 선명하고도 강력하게 표현했다:

“새로운 생산력을 얻기 위해 인간은 생산양식을 바꾸며, 그들의 생산양식 곧 그들의 생계를 얻는 수단을 선택하는 때에 그들은 그들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바꾼다. 맷돌이 당신들에게 봉건 영주들이 있는 사회를 가져다주었듯이 증기로 움직이는 제분소는 산업자본가들이 있는 사회를 가져다준다.”

이 뒤죽박죽 설명 속에 있는 첫 번째 중대한 오류는 바로 그 초기 상태에 있다: 이 기술은 애초에 어디서 오는 것인가? 또 기술은 어떻게 변동되고 개선되는가? 그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누구인가? 마르크스의 이론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겹겹이 쌓인 오류들에 대한 열쇠는 마르크스는 결코 그에 답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답을 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가 기술 상태나 기술의 변동이 인간의 행동, 개개의 인간들의 행동 때문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의 모든 이론 체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질이 인간 의식을 결정한다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간의 의식 즉 그것들에 대한 개개인의 의식이 물질적 생산력을 결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교리를 다음과 같은 요약할 수 있다: 태초에 “물질적 생산력”(material productive forces) 즉 인간 생산 활동의 기술 장비, 도구 및 기계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고 그것으로 그만이란다. 우린 단지 그게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더해 그 기술의 변동 또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덧붙일 수 있다.

더욱이, 미제스가 보여주었듯이 기술에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consciousness)이 더 중요하다:

“기술상의 발명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논증하고 품는 정신 과정의 산물이다. 생산 도구와 기계는 물질이라고 불릴 수 있겠지만 그것들을 창조한 마음의 작동은 분명히 정신적인 것이다. 마르크스적 유물론은 “상부구조적”(superstructural), 이념적(ideological)인 현상들이 물질적(material)인 것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지 못한다. 그것은 이 현상들이 필연적으로 발명이라는 정신적 과정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설명해 준다.”2

기계란 아이디어가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기술적 과정이란 발명만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발명 과정으로부터 산출되어야 할 뿐 아니라 구체적인 기계들 및 과정들 속에 구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발명뿐 아니라 저축 및 자본 투자도 필요로 한다. 이 점을 감안하면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곧 사회의 법 제도 및 재산권 제도는 저축이나 투자가 촉진될 것인지 혹은 억제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하면, 적합한 인과경로는 사상, 원리, 법적 권리 및 재산권이란 상부구조로부터 하부구조(base)로 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노동 분업이 사회에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계들에 대한 투자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사회적 관계, 사회 속의 협력적 노동 분업 및 교환이 기술의 정도와 발전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로가 아닌 것이다.​3

이러한 논리적 결함에 더해 유물론자들의 교리는 사실과도 맞지 않다. 명백히, 맷돌은 고대 수메르 지역에서 지배적이었던 맷돌(hand mill)이 봉건 사회를 당신에게 “갖다 준”(give you) 것이 아니다: 게다가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제분기가 나오기 오래 전에도 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했었다. 마르크스가 기술적 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을 따르다보니 그는 모든 중요한 새 발명을 마법과도 같은 “물질적 생산력”으로 보았으며 그 물질적 생산력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보았다. 독일의 선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마르크스의 친구였던 빌헬름 리프네히트(Wilhelm Liebnecht)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한때 런던의 전기기관차 전시회에 참석했었는데 그는 기뻐하며 전기(電氣)가 반드시 공산주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4

엥겔스는 기술적 결정론을 한참이나 더 전개하여 그것이 인간과 동물이 나뉘어지게 만든 불의 발명이라고까지 선언할 정도였다. 아마 동물 무리가 어떤 식으로 불을 전달받은 이후엔 위쪽 방향으로 진화해가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인간 자체의 출현이 단지 상부구조의 일부였다니 말이다.

논쟁을 위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잠시 그대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의 역사 변동 이론에는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난점들이 있다. 그의 이론에서 기술은 주어진 것이며 스스로 작동되는 장치처럼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어 가는 것인데 왜 그것은 “생산관계” 및 그 위의 상부구조를 혁명 없이 그저 순조롭게 바꿀 수는 없을까? 참으로, 만약 어느 시점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왜 하부구조의 변동이 상부구조에 대해 적합한 변동을 순조롭게 가져오지는 못하는 것일까? 다시금 마르크스의 이론 체계에 신비한 요인이 하나 더 들어온다. 기술 및 생산양식이 발전해 가면서, 주기적으로 그것들은 갈등, 곧 헤겔-마르크스에 특유한 용어에 의하면 과거 시점과 과거 기술에 맞는 여건 속에서 지속되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에 대해 “모순”(contradiction)을 낳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생산관계는 이제 기술적 발전을 막는 “족쇄”(fetters)가 된다. 그것이 성장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기 때문에 새 기술은 필연적으로 사회혁명을 초래하는데, 그 혁명은 과거의 생산관계 및 상부구조를 뒤엎고는 막혀있고 속박 하에 있던 새로운 생산관계 및 상부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봉건주의는 자본주의를 낳았으며 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술이 사회적 생산관계를 결정하게 되어 있다면, 그러한 생산관계의 필연적 변화를 지연시키는 신비한 힘은 무엇인가? 그게 인간의 완고함 혹은 습관 혹은 문화가 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이미 가르쳐준 바에 의하면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란 인간의 의지들과는 상관없이 인간을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생산관계 속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플라메나츠(John Plamenatz) 교수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대해 족쇄가 되는 것이라고 들었을(told) 뿐이다. 마르크스는 단지 이렇게 말할 뿐, 그 이유와 근거 자료 등을 결코 제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플라메나츠 교수는 그 모든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그렇다면, 아무런 경고나 설명도 없이 갑자기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오직 사회 혁명만이 해결할 수 있는 생산력-생산관계 간의 불가피한 양립불가능성이 종종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양립불가능성은 분명히 종속변수(생산관계)가 독립변수(물질적 생산력)의 자유로운 작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독립변수가 종속변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것은 놀라운 말이 되는데 그런데도 마르크스는 그게 해명이 필요함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잘 나가고 있다.”​5

플라메나츠 교수는 그러한 큰 혼란의 부분적 이유는 마르크스가 “생산관계”를 적절히 정의하지 못한 것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또 그 점을 위장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 왔다. 이 생산관계란 개념은 분명히 법적인 재산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적 소유관계가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조정이 지연되어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그리하여 족쇄를 만든다면, 마르크스는 그 문제가 진실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 혹은 정치적인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정력을 가진 하부구조는 완전히 경제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은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어진 상부구조의 일부일 뿐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경제적인 것이라고 주장되었던 “사회적 생산관계”가 족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생산관계가 재산권 제도나 법적 제도를 의미할 경우에만 타당한 말이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생산관계”를 아주 애매하고도 모호하게 만들어서 이 관계가 소유권 구조를 포함하는 것으로, 또는 그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또 다른 경우에서는 이 양자가 완전히 구분된 실체인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었다. 이 방법을 통해 그는 자신의 딜레마를 빠져 나온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뜻을 모호하게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재산권 제도는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legal expression of the relations of production)이라고 말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상부구조의 일부가 될 수 있게 하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생산관계”의 경제적인 부분이 될 수 있게도 한 것이다. “법적 표현”이란 것도 정의되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플라멘츠 교수가 요약하듯이, 유물론적 혹은 경제결정론의 마르크스적 테제에 너무나 필수적인 “생산관계”라는 완벽한 개념은 마르크스에게 마르크스 이론 전선에 있는 치명적인 갭을 메꾸는 유령 대대(ghost battalion)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6 그러나 이 모든 것 속에서도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경제적 결정론이 이해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또한 이 생산관계들이 생산양식(modes of production)에 의해 결정될 수 있게 해주거나 혹은 생산양식이 재산권 제도를 직접 결정하게 해주는 길도 없다.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인과 관계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즉 인간의 사상(idea)이 재산권 제도를 결정하며 그것은 다시 저축과 투자 및 기술 발전을 촉진하거나 위축시킨다는 관계이다.

루카치(Lucacs)에서 제노베제(Genovese)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흔히 마르크스 및 그 직계 추종자들의 기술적 결정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들은 모든 세련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인과론이 단일 방향적인 것이 아니고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와 상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종종 그들은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세련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자료들을 왜곡하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자신들이 사실상 마르크스를 버렸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단일방향 인과론으로 된 기술적 결정론이며 우리가 서술해 온 것 외의 다른 모든 오류들이 있는 것이다. 혹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어서 어떠한 필연적 기제 혹은 심지어 변증법적인 것이라 할 만한 기제도 없는 것일 뿐이다.​7


저자) 머리 로스버드(Murray N. Rothbard)

로스버드(Murray N. Rothbard, 1926-1995)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각으로 개인중심적 자유와 시장경제이론의 적극적 창달에 앞장섰던 경제학자 및 정치철학자이다. 『인간, 경제, 국가』(Man, Economy, and State, 1962), 『정부는 우리 화폐에 무슨 일을 해왔는가?』(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1963) 등의 저서가 있다. 이 글은 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1995)의 제 2권 12장에서 발췌한 것이다.


Haeng-Bum Kim is professor of public choice at Pusan National University, Korea. Mises.kr

역자) 김행범 (부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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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Ludwig von Mises, Theory and History (1957, Auburn, Ala.: Mises Institute, 1985), pp. 111–2.
  • 2. 위 책, pp. 109–10.
  • 3.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프루동(Proudhon)이  노동 분업이 기계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바로 이 점을 주장한 것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 4. M.M. Bober, Karl Marx's Interpretation of History (2nd rev. 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48), p. 9.
  • 5. John Plamenatz, German Marxism and Russian Communism (New York: Longmans, Green & Co., 1954), p. 29.
  • 6. 위 책, p. 27.
  • 7.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인 플레하노프(George V. Plekhanov, 1857–1918)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단일방향 인과론을 옹호한 것에 대해서는 플레하노프의 The Development of the Monist View of History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73)를 보라. 이와 대비하여 David Gordon, Critics of Marxism (New Brunswick, MJ: Transaction Books, 1986) p.22를 참조하라. 마르크스주의-플레하노프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코와코프스키(Leszek Kolakowski)의 Main Currents of Marxism(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pp. 340–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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